'내가 없는 동안 잘 있었어?' 라는 말은 나올 수 없었다. 물건들은 온통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데다무수하게 흩어진 유리조각들 때문에 집안은 온통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끼는 별하가 있었다. 아침에 정성스레 양쪽으로 땋아내린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져있고 오늘 처음 입혔던 옅은 녹색의 원피스는 피얼룩이 잔뜩 묻어있는 데다 온통 찢어져 있어 넝마를 걸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태이는 혀를 찼다. 별하는 태이가 한시라도 자신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했다. 울부짖으며 자기 이름을 부르고 다니는 건 기본이요,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집어 던지는 바람에 남아나는 것들이 없었다. 그뿐이면 좋겠지만 자기한테 시위라도 하는 것 마냥 칼로 팔을 수없이 내리긋는 바람에 새하얀 팔에는 붉은 칼자국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해가 될만한 날카로운 도구들이나, 혹은 그것을 만들만한 가구들은 전부 치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너무 얕았던 모양이다. 창문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며 태이는 주저앉아 있는 별하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얼마나 울었던 건지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끅끅거리는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아 자신의 품으로 향하게 하고는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별하는 품 안에서 그의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기는 했지만 그 움직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멈췄다. 눈을 떴는데 네가 보이지 않았어. 무서웠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별하는 눈을 감았다. 그랬구나.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일이 너무 늦게 끝났어. 태이는 그녀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달래는 투로 말했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어. 내가 더는 보기 싫어서 가버렸다고 생각했어. 태이는 낮게 웃었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별하는 태이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품에서 빠져나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사랑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그렇다면 보여줘."
네 사랑을 증명해. 네 애정에 나를 빠트려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어줘. 나를 망가트려 줘. 나를 집어삼켜 줘. 별하는 태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새카만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그의 얼굴만을 비췄다. 태이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올라갔다. 떨리는 손으로 별하의 얼굴을 한참 이리저리 매만지기만 하던 태이가 곧 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먹어치웠다. 머리 위에서 전등이 수어번 깜박거렸다.
*
태이는 옆에 누워 잠에 깊이 빠져든 별하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듣는 바람에 그만 제어를 못 하고 평소보다 그녀를 더 몰아붙이고 말았다. 흉터 자국과 함께 그가 새긴 사랑의 표식들을 손끝으로 더듬어 내려가며 태이는 아까 별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망가트린다, 라…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미 너는 내 품 안에서 망가졌는데. 태이는 별하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넘겨 주고는 드러난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가 아는 별하는 고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사전에서 흐트러짐이란 단어는 용납될 수 없었다. 이는 외적인 면에 해당되는 사항이었지만 내적으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때이든, 어떤 장소에서든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한 치의 티끌도 없이 완벽했다. 그런데 그런 별하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에서 고고하게만 있을 것 같았던 별이 추락했다. 아니, 더러운 자신과 똑같이 저속해져버렸다.
드디어 나와 같아졌어.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경외하고 찬미해 마지 않던 그의 여신이 그와 같은 눈을 하고 그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에게 짜릿한 희열과 최고의 만족감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너를 가졌으니 이제 나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별하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태이는 나지막이 속삭였다.하지만 이제 술래가 바뀌었으니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겠지?